남산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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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남산 전투는 1904년 러일 전쟁 중 일본군이 랴오둥 반도 남산 언덕에서 러시아군을 공격하여 승리한 전투이다. 압록강 전투에서 승리한 일본 제2군은 다롄 점령을 목표로 남산 언덕을 공격했으며, 러시아군은 참호와 지뢰, 기관총 등으로 방어했다. 1904년 5월 26일, 9차례의 공격 끝에 일본군은 남산 언덕을 점령하고 욱일기를 게양했으며, 러시아군은 뤼순으로 후퇴했다. 일본군은 이 전투에서 6,198명의 사상자를 냈으며, 34,000발의 포탄과 219만 발의 소총탄을 사용했다. 남산 전투의 승리는 일본군에게 뤼순 포위의 발판을 마련했으며, 이후 다롄을 점령하고 노기 마레스케 장군의 기념탑을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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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04년 5월 - 압록강 회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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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산 전투 - [전쟁]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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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투 개요 | |
전투명 | 남산 전투 |
로마자 표기 | Nanzan no tatakai |
러시아어 명칭 | Сражение при Цзинь-чжоу/Кинь-чжоу (스라제니예 프리 치진-초우/킨-초우) |
시기 | 1904년 5월 24일 – 1904년 5월 26일 |
장소 | 만주 뤼순 항 북방 |
결과 | 일본의 승리 |
관련 전쟁 | 러일 전쟁 |
![]() | |
교전 세력 | |
교전국 1 | 일본 제국 |
교전국 2 | 러시아 제국 |
지휘관 | |
일본 제국 | 오쿠 야스카타 |
러시아 제국 | 아나톨리 스테셀 미트로판 나데인 알렉산드르 포크 니콜라이 트레티야코프 |
병력 규모 | |
일본 제국 | 35,500명 |
러시아 제국 | 3,800명 (총 17,000명이었으나 전투에 참여하지 않음) |
피해 규모 | |
일본 제국 | 6,198명 사망, 부상, 포로 |
러시아 제국 | 사망: 182명 부상: 836명 실종: 598명 |
2. 배경
압록강 전투에서 승리한 일본 제2군은 랴오둥 반도에 상륙했다. 오쿠 야스카타가 이끄는 일본 제2군은 제1사단, 제3사단, 제4사단을 포함한 총 38,500명의 병력으로 구성되었으며, 다롄 점령과 뤼순 포위를 목표로 했다.
압록강 전투 이후, 일본군 제2군은 요동 반도에 병력을 배치했다. 러시아군은 요동 반도의 요충지인 남산(116m)에 야전포 114문과 기관총을 설치하고, 참호와 철조망, 지뢰밭을 갖춘 현대식 진지를 구축했다. 일본군은 이러한 현대식 진지를 공격하는 것은 처음이었지만, 중국에서 얻은 정보를 통해 요새의 구조를 파악하고 있었다.
러시아 제국 총독 예브게니 알렉세예프는 니콜라이 2세와의 협의를 위해 모스크바로 소환되었다. 그는 관동 반도의 러시아 지상군 지휘관으로 아나톨리 스토셀 소장을, 뤼순항의 러시아 함대 사령관으로는 빌헬름 비트게프트 제독을 임명했다. 스토셀 장군은 약 17,000명의 병력을 보유했으며, 이 중 니콜라이 트레티야코프 대령이 지휘하는 제5동시베리아 소총 연대 병력 약 3,000명이 남산 언덕에 참호를 파고 방어 태세를 갖추었다.
러시아군은 114문의 야전포와 기관총을 보유하고, 참호, 철조망, 지뢰밭을 갖춘 현대식 진지를 구축하여 요새화했다. 일본군은 중국에서 얻은 정보를 통해 이러한 요새의 구조를 파악하고 있었다.
3. 전투 경과
진저우 만에서 일본 해군은 함포 사격으로 공격을 지원했지만, 러시아군의 강력한 방어에 큰 피해를 입었다. 그러나 끈질긴 공격으로 포탄이 소진된 러시아군은 결국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 제2군은 남산을 점령하고 승리했다.
제2군은 남산에서 탄약 보급을 받고 만주로 향했다. 철수한 러시아군은 뤼순으로 후퇴하여 배수진을 치고, 제3군과 대치하게 되었다. 이 전투에서 제3군 사령관 노기 마레스케는 아들 노기 가쓰노리를 잃었다.[2]
러시아 측 지휘는 처음에는 나데인 장군이, 이후에는 알렉산드르 포크 장군이 맡았다.
3. 1. 진저우 성 공방전
압록강 전투 이후, 제2군은 요동 반도에 병력을 배치했다. 1904년 5월 24일, 거센 폭풍우 속에서 오가와 마타지 중장이 지휘하는 일본 제4사단이 남산 언덕 북쪽에 위치한 진저우(金州) 성벽 도시를 공격했다.[2]
400명에 불과한 병력이 구식 포로 방어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제4사단은 성문을 돌파하려는 두 번의 시도에 실패했다. 1904년 5월 25일 05:30에 제1사단의 두 개 대대가 독립적으로 공격을 시작하여 마침내 방어선을 돌파하고 도시를 점령했다.[2]
3. 2. 남산 진지 공방전
압록강 전투 이후, 일본군 제2군은 요동 반도에 병력을 배치했다. 러시아군은 요동 반도의 요충지인 남산(116m)에 야전포 114문과 기관총을 설치하고, 참호와 철조망, 지뢰밭을 갖춘 현대식 진지를 구축했다. 일본군은 이러한 현대식 진지를 공격하는 것은 처음이었지만, 중국에서 얻은 정보를 통해 요새의 구조는 파악하고 있었다.
1904년 5월 24일, 오가와 마타지 중장 지휘 하의 일본 제4사단이 남산 언덕 북쪽에 위치한 진저우(오늘날의 진저우 구 金州)를 공격했지만, 구식 포를 가진 400명에 불과한 병력으로 방어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두 번의 시도 모두 실패했다. 5월 25일, 제1사단의 두 개 대대가 공격을 시작하여 방어선을 돌파하고 도시를 점령했다.[2]
측면을 확보한 오쿠 야스카타 장군은 남산 언덕의 러시아군 진지에 대한 본격적인 공격을 시작했다. 5월 26일, 일본군은 해군 함포 사격 지원과 함께 3개 사단의 보병 공격을 감행했다. 러시아군은 지뢰, 맥심 기관총, 철조망 등으로 일본군에게 막대한 피해를 입혔다. 아홉 번의 공격 시도 끝에도 일본군은 러시아군 진지를 함락시키지 못했고, 양측 모두 포탄이 거의 소진되었다.[2]
러시아군 지휘관 알렉산드르 포크 중장은 일본군의 측면 공격을 우려하여 후퇴를 명령했다. 니콜라이 트레티야코프 대령은 탄약 부족과 포위 위협 속에서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19시 20분, 일본군은 남산 언덕을 점령하고 욱일기를 게양했다. 전투에서 선전했지만, 제대로 지원받지 못한 트레티야코프는 뤼순 주변의 주요 방어선으로 후퇴하면서 더 많은 병력을 잃었다.[2]
4. 피해 규모
러시아군은 전투에서 총 1,400명 정도의 사망, 부상, 실종자가 발생했다. 일본군은 최소 6,198명의 사상자를 냈는데, 이 중에는 노기 마레스케 장군의 장남도 포함되어 있었다.[2] 일본군은 전투에서 34,000발의 포탄을 발사했는데, 이는 청일 전쟁 전체에서 사용된 것보다 더 많은 양이었다.[2] 또한 일본군은 하루 동안 219만 발의 소총탄과 기관총탄을 발사했는데, 이는 프로이센군이 오스트리아-프로이센 전쟁 전체에서 발사한 탄약 수 (약 200만 발)보다 더 많은 수치였다.[3]
5. 전투의 결과 및 영향
일본군은 탄약 부족으로 1904년 5월 30일까지 남산에 머물렀다.[2] 러시아군은 전략적 요충지인 다롄 항구를 방어하지 않고 뤼순으로 후퇴했다. 일본군은 다롄을 무혈 점령하고 항만 시설, 창고, 철도 기지를 온전히 확보했다.[3]
압록강 전투 이후 제2군은 만주로 향했다. 철수한 러시아군은 뤼순에서 배수진을 치고, 제3군과 대치하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제3군 사령관 노기 마레스케는 제2군 소속이었던 장남 노기 카츠노리를 전투에서 잃었다.
러시아군은 전투에서 총 1,400명 정도의 사망, 부상, 실종자를 냈다. 일본군은 최소 6,198명의 사상자를 냈지만 승리했다. 사망자 739명 중에는 노기 마레스케 장군의 장남도 포함되어 있었다. 일본군은 전투에서 34,000발의 포탄을 발사했는데, 이는 청일 전쟁 전체에서 사용된 것보다 더 많은 양이었다.[2] 또한 하루 동안 219만 발의 소총탄과 기관총탄을 발사했는데, 이는 프로이센군이 오스트리아-프로이센 전쟁 전체에서 발사한 탄약 수보다 더 많은 수치였다.[3]
일본이 다롄을 점령한 후, 난산 언덕 정상에 노기 장군의 시가 새겨진 기념탑이 세워졌다. 이 탑은 태평양 전쟁 이후 철거되었고, 현재는 기초만 남아 있다. 시가 새겨진 석비의 일부는 현재 뤼순 감옥에 보관되어 있다. 1993년, 남산(南山) 산정부는 "남산 러일 전쟁 유적(南山日俄戦争遺址)"으로 다롄시급(大連市級) 문화재 보호 단위로 지정되었으며, "남산 전적비(南山戦蹟碑)" 터와 "금주성 외에 지는 해에 서다(金州城外斜陽に立つ)" 시비 터가 남아 있다.
6. 전후
일본은 다롄 점령 후 난산 언덕 정상에 노기 마레스케 장군의 시가 새겨진 기념탑을 세웠으나, 태평양 전쟁 이후 철거되었다. 현재 남산에는 "남산 러일 전쟁 유적"이 다롄시급 문화재 보호 단위로 지정되어 있으며, "남산 전적비" 터와 "금주성 외에 지는 해에 서다" 시비 터가 남아 있다. 노기 마레스케가 1904년 6월 6일, 남산을 방문하여 읊은 "금주성 외에 지는 해에 서다" 시비는 현재 뤼순의 러일 감옥 옛터 박물관 창고에 소장되어 있다.[1]
참조
[1]
간행물
Russian Main Military Medical Directorate (''Glavnoe Voenno-Sanitarnoe Upravlenie'') statistical report
1914
[2]
서적
Historical Dictionary of the Russo-Japanese War
[3]
서적
The Russo-Japanese War in Global Perspective: World War Zero
Brill Academic Pub
2005-05
[4]
간행물
Russian Main Military Medical Directorate (''Glavnoe Voenno-Sanitarnoe Upravlenie'') statistical report
19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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